마음의 힘이 되는 심리컬럼입니다
"초등학생 딸이 BB크림을 바르기 시작했어요."
<소녀를 위한 메이크업 가이드>
10대 청소년은 물론 초등학생들도 BB크림을 바르는 시대다. 하지만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본 엄마의 심정은 복잡하다. 무조건 하지 말라고 반대를 하자니 아이와 싸우기 십상이고,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자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한 걸까.
얼마 전 10대 아이들의 용어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중 가장 큰 관심을 받은 단어는 바로 ‘컴싸아라’다. 얼핏 들어서는 어떤 뜻인지 짐작조차 힘들지만 10대는 물론 초등학생들에게도 유명한 단어라고 한다. 컴싸아라란 컴퓨터용 사인펜 아이라이너의 준말로 주로 시험 답안을 작성할 때 쓰는 컴퓨터용 사인펜을 눈 화장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활용법이지만, 실제로 화장품을 사기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유용한 팁이라고 한다. 컴싸아라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화장법에 관심이 많은지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10대 화장’만 검색해도 금세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잘 어울리는 화장법을 알려주세요’, ‘중학교 1학년인데 아이라인 그리기가 너무 어려워요’ 등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솔직한 고민이 줄줄이 나온다. 아이들의 현실을 가장 먼저 느끼는 사람은 바로 사춘기 딸을 둔 부모다. 부모 눈에는 아직 어리기만 한 딸이었는데 언제부턴가 BB크림을 바르며 등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더욱이 대부분의 부모 세대들은 화장을 하는 아이들은 학업엔 관심이 없는 불량한 학생이라 여겼던 터라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아이를 붙잡고 “화장하지 마”라고 운을 떼면 아이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왜?”라고 묻는다. 아이의 화장을 단념시킬 그럴듯한 명분을 생각해내려 애쓴 끝에 “학생은 화장하는 거 아냐”, “일찍 화장을 하면 피부 망가져”,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해야지”라는 대답이 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나라님도 못 이기는 천하무적 사춘기 소녀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 만무하다. 결국 하지 말라는 부모와 하겠다는 아이가 대립 하며 갈등만 깊어지게 된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매출 좌우하는 10대 파워>
거리에서 만나는 화장한 10대를 보면 하나같이 화장법이 똑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본래 자기 피부톤보다 2단계는 밝게, 무조건 얼굴을 하얗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목과 얼굴의 경계가 도드라지고 피부 화장은 답답해 보인다. 또 눈을 강조하는 아이 메이크업을 중요하게 생각해 아이라인은 두껍게 그려 눈꼬리 끝을 최대한 길게 뺀다. 한마디로 피부는 하얗게, 눈은 커 보이는 화장법을 선호한다.
이런 유행 때문에 아이들의 화장품 소모는 굉장히 빠른 편이며 자연스럽게 화장품을 구매하는 빈도도 잦다. 어른의 입장에선 ‘아이들이 사면 얼마나 사겠어’ 싶겠지만 현재 화장품 업계의 주요 소비층을 살펴본다면 아이들의 주머닛돈이라 무시하는 생각이 사라지게 된다. 로드 숍 브랜드 화장품 매출 1위인 더페이스샵의 경우 최근 3년간 10대 회원이 23만 명에서 49만 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일각에선 10대 회원들이 매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서울 명동의 로드 숍 매장을 방문하는 10명 중 5명은 일본이나 중국 관광객이고, 나머지 5명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 그래서 어린 소비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화장품 업계에선 적극적으로 맞춤형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화장품 브랜드의 양대 산맥이라고 꼽히는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은 각 ‘나나스비’와 ‘틴:클리어’라는 10대 전용 화장품을 출시했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돌을 홍보 모델로 기용하며 어린 고객 유치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10대 취향을 겨냥해 제품 컨셉트와 디자인, 제품명 등을 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 중저가 브랜드 숍은 공주풍의 소녀스러운 컨셉트를 내세우고 있고, 매장은 마치 인형의 집처럼 꾸몄으며 판매하는 제품 역시 아기자기해 장난감을 연상시킨다. 당연히 매장 안에 북적이는 고객 또한 교복 입은 아이들이다. 아무리 중저가라고 해도 아이라이너 하나에 6천~8천원 선, BB크림은 1만5천~2만원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하는 세일 기간이면 말이 달라진다. 로드 숍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30~50%로 할인의 폭이 굉장히 커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연령대는 점점 낮아진다. 초등학생의 경우엔 문구점에서 화장품을 사는 일도 제법 된다. 저가 브랜드 숍의 가격보다 더 저렴하며 접근성이 쉬워 호기심에 한두 개 사기에 딱 좋다. 문제는 문구점에서 파는 화장품 대부분이 검증되지 않은 제품이라는 점이다. 성분 표시가 거의 돼 있지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게 만들어졌다. 한눈에도 성분이 의심 가는 수준인데, 이는 문구점 화장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저가 화장품에 가장 많이 들어간 순으로 전 성분을 나열해보면 각종 합성계면활성제와 폴리머, 심지어 자극성이 높은 파라벤이 무려 5종이나 들어가 있는 것도 있다. 광고에서는 각종 고가의 추출물이 들어갔다고 주장하며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발암성이 높고 내분비 장애 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위험 물질들이 들어 있기도 하다. 저가 브랜드가 주장하는 합리적 가격 책정이라는 것은 화장품 제조원가를 더 떨어뜨리기 위해 값싼 석유계 화학물로 만들었다는 일부의 지적도 있다.
성장기 아이들이 이런 화학물질이 들어간 화장품을 지속적으로 바르게 되면 암을 유발하고 불임과 호르몬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져 더욱 위험하다. 게다가 호르몬 분비가 활발한 10대 피부에 성인용 화장품을 사용하게 될 경우 여드름과 같은 피부 트러블이 심해지기 쉽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화장을 하지 마라”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 올바른 화장 교육법이 필요한 이유다.
<아이의 화장은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화장을 하는 것일까. 아이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즉 사춘기에 접어들면 급격한 호르몬 변화로 인해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게다가 고등학생도 성형을 할 만큼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 10대 아이돌 스타의 대거 등장 등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허그맘 아동청소년 심리 상담 강동센터 양소영 원장은 부모들의 걱정과 달리 “아이들의 화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사춘기 아이들은 신체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2차 성징을 겪게 된다. 예쁜 외모를 갖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화장을 그 수단으로 삼은 것일 뿐 비행이나 반항의 증거는 아니다.
아이가 화장을 한다고 해도 학업과 일상에 별 무리가 없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화장품 사는 데 집착을 하며, 다른 것은 일절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부모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해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보이는 것, 즉 자신의 외적인 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간혹 “우리 아이는 화장에 전혀 관심이 없다”라며 자랑을 하는 부모가 있다. 하지만 양소영 원장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며 딱 잘라 말한다. 이런 아이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어떠한 이유로 화장을 하고 싶거나 예뻐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경우와 자존감이 낮아 어차피 꾸며도 나는 예쁘지 않고 오히려 이상해질 것이라고 생각해 회피하는 경우다. 결국 아이가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자랑할 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면밀히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양소영 원장은 조언한다.
아이가 화장을 시작한다면 부모는 제일 먼저 딸이 외모를 꾸미고 싶어 하는 사춘기가 된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럴 땐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려보면 도움이 된다. 먼저 어른의 시선을 내려놓아야 아이와 바른 대화를 할 수 있다. “화장을 왜 하니?”가 아닌 “화장을 해서 예쁘게 보이고 싶구나”라고 공감을 하며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다. 충분한 공감을 나눈 뒤에는 어떤 화장품을 사용해야 하는지, 왜 과한 화장이 좋지 않은지 등에 대해 차분히 대화하듯 이야기할 것을 추천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상담 센터를 찾는 모녀 중 상당수가 ‘아이의 화장’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찾아올 정도로 많다. 수많은 사례를 접하지만 딸과 엄마의 입장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다고. 특히 엄마들은 양 원장에게 “우리 아이가 이상해졌어요. 제발 화장을 안 하게 고쳐주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부모들은 ‘화장은 나쁜 것=고쳐야 하는 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딸과 엄마는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의 골만 깊어진다.
양소영 원장은 만약 딸과 대화가 힘들다면 함께 피부과 전문의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현재 피부 상태, 앞으로 피부 변화에 대한 진단을 받으며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또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 아이의 화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딸의 문제이기 전에 부모의 문제다. 타고난 기질적인 문제이거나 부부 문제 등 다른 외부 문제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자녀를 키우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공감하려는 자세다. 그제야 비로소 BB크림을 바른 얼굴이 아닌 훌쩍 자란 딸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Profile 양소영 원장은…
아동 상담 전문가이자 부모 교육 전문가로 초등학생의 심리를 다룬 「청개구리 초등 심리학」을 썼다. 라디오, TV 등 언론은 물론 기업체, 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며 종횡무진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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